2022. 4. 18. 01:36 리뷰/책 이야기

자살론

자살론 요약 (에밀 뒤르캠, 1897)


 자살론은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대응방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자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다뤄지도록 패러다임을 바꾼 책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책은 1897년에 출간됐으며, 나는 청아출판사에서 2019년 8월에 낸 번역본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언뜻 개인적 문제로 보이는 자살의 이면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관리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자살률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자세하게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는, ① 사회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지거나(이기적 자살), ② 사회의 통제에 지나치게 구속되며 사회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자살을 종용받거나(이타적 자살), ③ 사회질서의 붕괴로 인해 욕망과 현실 사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괴리가 생기는 경우다.(아노미적 자살)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당한 통제력을 가진 사회가 필요한데, 직업 집단(조합)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가족사회는 쉽게 흩어져 통제력이 없고, 정치사회는 너무 멀어 통제력이 없고, 종교사회는 권위를 잃어 통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직업 집단은 개인들의 탐욕을 규제할 만큼 충분히 개인들을 지배할 수 있으며, 개인들의 욕구에 공감할만큼 개인들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업 집단을 발전·개선시켜 나가며 활용해서 사회의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
 
 뒤르켐의 자살론 출간 이후 책 내용에 대한 많은 비판적 연구들이 뒤따랐고, 저 ‘직업 집단(조합)’이라는 것이 현대사회에서도 책에서 주장한 것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위 요약 내용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도 책에서 제시한 주장·유형분류·해결방안 등이 완벽히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이 쓰여지고 100년이 넘게 흘렀으므로, 보다 발전된 기법으로 자살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면 조금 달라진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론이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패러다임에는 동의한다. 자살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하는 개인적 맥락의 자살들도 있겠지만, 사회문제로 인한 자살도 분명히 많다. 그리고 후자의 자살들은 우리가 정책과 제도 등을 통해 줄일 수도 있다.
 
 책의 굵직한 내용을 정리하면 여기까지다. 핵심은 이렇게 짧고, 책 내용의 대부분은 논리전개 및 통계제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내용들은 뒷받침에 이용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책의 주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는 빠지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의 내용들이 인상깊었다. 자살이라는 소재를 떠나서,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사회과학자의 태도를 정말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통찰하고, 그 통찰로부터 기존의 오류를 찾아내고, 새로운 논리적인 판단을 제시하고, 통계적 해석으로 기존의 오류와 자기 주장의 합당함을 증명하는 – 이 일련의 흐름이 똘똘해보였다. 시대배경이 시대배경인지라 그다지 특별한 통계적 기법은 쓰이지 않았으나,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통계를 이용해야 하는지 선택해오는 통찰력과 해당 통계를 기반하여 적절한 분석을 내어놓는 논리력이 인상깊었다. 새삼 나도 책을 많이 읽고 사람을 많이 만나며 더 똘똘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리뷰는 여기까지 하고, 아래로는 책 내용을 조금 더 세세하게 정리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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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리>

 자살론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자살이 비사회적 요인으로 발생한다는 기존 통념을 반박하고, 그로부터 자살은 사회적 요인에 기인함을 주장한다. 2부에서는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 원인에 따라 유형을 구분한다. 3부에서는 우리가 자살을 왜 줄여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렇게 ‘자살은 사회문제고, 따라서 우리는 자살이 적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라는 주제의식을 길게 전달한다.
 
 1부에 들어가기 전에 ‘자살’이라는 말을 정의하고 시작하는데, ‘자살자 자신이 그 결과를 알고 행하는 적극적 또는 소극적 행위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결과로 인한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마음가짐 등은 기준을 삼을 수 없지만, ‘죽을 것이라는 결과를 알고 행하는’이라는 조건은 판단기준으로써 비교적 뚜렷하기에 위 정의는 꽤나 적절한 것 같다.


 [1부]

 1부는 자살에 대한 기존 인식, ① 자살은 주로 정신질환에 기인한다, ② 자살은 유전이다, ③ 자살은 자연환경(기후, 계절)의 영향이다, ④ 자살은 모방행동이다 –를 하나씩 반박한다. 이로써 자살이 비사회적인 현상(사회 차원에서 변화시킬 도리가 없는 개인의 생물학적·심리적 현상)이 아님을 확인하고, 따라서 우리는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며 접근해야 함을 주장한다.

 각 인식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반박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잠시 반박의 맥락을 벗어나 이후 주장(자살은 사회문제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런 내용은 넘버링을 하지 않고 [참고] 라고 적어놓았다.

 ① 자살은 주로 정신질환에 기인한다.
  (1) 아니다. 의학적 분류에 따른 정신병 환자의 자살은 유형(조병/우울증/강박증/충동적)을 막론하고 동기가 전혀 없거나 상상 속의 동기로 결행된다. 하지만 유서 등을 통해 보면 자살자 대다수는 동기가 있으며 그 동기가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2) 여러 기간에 걸친 많은 국가들의 통계를 기준으로 해당 가설을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은 모순들이 있다. 첫째로, 정신병 환자는 여성이 더 많은데(52.4%), 자살자는 남성에게서 더 많다(약 80%). 둘째로, 개신교/가톨릭/유대교 중 정신질환은 유대교도들에게 가장 많이 발생하지만 유대교도는 셋 중 자살 경향이 가장 낮다. 셋째로, 정신질환은 30세 전후에 가장 빈번하며 그 시기를 지나면 점점 줄어들지만, 자살 경향은 유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정하게 증가한다. 넷째로, 국가별 지역별 분류 등을 통해 정신질환 발병률과 자살률을 대조해봐도 추세적 관련이 없다.
 (3) 따라서, 한 사회의 자살자 수는 정신질환자 수의 많고 적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② 자살은 유전이다.
  (1)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기질적 결정 요인이 있다면 그 요인이 남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거의 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남성의 자살이 여성보다 훨씬 많다.
  (2) 자살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추세적으로 증가하는데, 어떤 신체적·심리적 특성도 무한히 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자살은 유전보다는 오히려 사회생활의 점진적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③ 자살은 자연환경(기후, 계절)의 영향이다.
  (1) 자살의 60%가 3월~8월 사이의 따뜻한 계절에 일어난다는 이유로, 자살이 따뜻한 계절의 넘치는 에너지가 폭력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자살은 흥분과 격노 때문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극심한 의기소침의 결과일 때도 매우 많다. 만약 열이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면, 전자의 유형은 촉진하더라도 후자의 유형은 감소시킬 것이라 전체 자살률엔 되려 변동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가설은 합리적이지 않다.
 (2) 그리고 자살이 기온의 영향이려면 지리적 분포에 따라 자살률이 동일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참고] 다만, 이 가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확인해보니 자살은 낮의 길이에 비례함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계절에서나 낮~저녁에 일어난 자살이 80%였고, 밤의 자살은 20%밖에 안 됐다. 그러나 우리는 기온이 원인이 아님은 위 (2)에서 확인했다. 따라서 이는 인간관계가 빈번하고 사회생활에 집중되는 시간에 자살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요일별 자살률을 보니 월~목의 일평균 자살률(15% 내외)이 금~일의 일평균 자살률(12% 내외)보다 높았다. 그리고 국가 및 도시 단위로 계절별 자살률 편차를 확인해보니, 국가 전체적으로는(농업 비중 높음) 대부분의 국가가 계절별 자살률이 45%~68%까지 차이가 나는 반면 대도시(사회활동에 계절의 영향을 덜 받는 상공업/예술/과학/사회활동 위주)는 계절별 자살률이 12~25%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④ 자살은 모방행동이다.
  (1) 일단, 집단의 행동방식을 배우고 따르는 것은 모방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자살이 기질적인 문제인지를 논하고 있으므로, 사회와 무관하게 인간이 심리적·기질적으로 행하는 모방만 고려한다. 
  (2) 그런데 이러한 모방이라면, 여타 생물학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전염의 형태를 보일 것이다. 즉 전염의 중심이 되는 곳이 있어야 하며, 그 곳을 중심으로 주변부로 퍼져야 한다. 중심은 주변부보다 높은 자살 경향을 보여야 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살 분포도를 보면 별도의 중심부가 없다. 대체로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분포한다.
  [참고] 자살은 대도시, 문명화된 곳, 교육수준이 높은 곳에서 많이 발생한다.
 
 
 [2부]

 2부는, 1부에서 자살이 비사회적 현상이라는 주장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세워진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다’라는 전제 하에 내용이 진행된다. 2부의 방향성은 원문에 잘 정리되어 있어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 우리는 자살의 직접적인 발생 원인을 판정할 것이며, 그런 원인이 특정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형태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동기와 생각은 무시하고, 자살 발생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종교적 신앙, 가족, 정치 집단, 직업군 등 다양한 사회적 환경 상태를 직접 조사할 것이다. 그렇게 한 후에야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보편적 원인들이 어떻게 개인화되고 어떻게 자살을 일으키는지 연구할 것이다.(p.177)
 
 2부에서는 자살을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이기적 자살/이타적 자살/아노미성 자살이 그 유형들이다. 전체 요약에서 설명했듯이,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질 때 행하는 자살이다. 이타적 자살은 사회의 통제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사회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자살을 종용받아 하게 되는 자살이며,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질서의 붕괴로 인해 욕망과 현실 사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괴리가 생겼을 때 행하는 자살이다. 아마도 위와 같은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것이므로, 각 자살유형에 대해 책의 내용을 정리해서 옮겨와본다.

 ① 이기적 자살
 : 인간은 사회로부터 너무 멀어져 개인 자신으로부터밖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면 자살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원인으로 행하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이라고 한다. 해당 단원의 마지막에 이기적 자살의 성격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간은 심리적 기질 때문에 자신을 초월하고 영속성을 갖는 어떤 대상에 귀속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개인만으로는 삶의 충분한 목적이 못 된다. 한 개인은 너무 작기 때문이다.(p.261)
 우리가 자신 외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면 우리 자신이 결국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에 삶의 용기와 행동하고 투장핼 용기를 잃게 된다(262쪽)
 누군가가 공동체의 진정한 일원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어 공동체가 낯설게 느껴질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되며 결국 다음과 같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질문을 피할 수 없데 된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263쪽)
 
 물론 이 결론은 뜬금없이 나온 결론은 아니다. 결론에 앞서 종교집단/정치집단/가족집단의 자살경향을 확인 및 검토하였고, 그로부터 위와 같은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다뤄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종교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개신교 신자는 가톨릭 신자보다 작게는 20~30%부터 크게는 300% 까지 더 많이 자살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교리상 자살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이는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종교집단의 성격의 차이다. 두 종교의 성격상의 차이는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탐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권위적으로 개인의 의지를 하나의 동일한 목표로 합일한다면, 개신교는 개인의 판단을 허용하여 신자들의 삶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결속력과 지속력이 약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개신교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개신교의 통합력이 가톨릭보다 약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초등교육을 훨씬 많이 시킨다. 개개인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배움의 욕망이 종교적 측면에서는 공통된 신념을 약화함으로써 자살률을 높이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1826년~1880년간 프랑스에서 전문직 종사자 1백만명당 자살자 수는 558명이었고, 하인 직업군은 290명이었다. 다른 나라의 통계를 봐도 지적 엘리트 집단은 늘 가장 높은 자살률을 가진다. 또한,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남성이 여성보다 많이 자살하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남성들의 교육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 유대교는 예외적인데, 교육열이 압도적임에도 자살률이 낮다. 다만 이는 종교적 소수 집단이 주변의 증오에 맞서기 위해 지식을 필요로 하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 집단의 응집력과 자살이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그것은 종교 자체보다는 종교가 하나의 사회로서, 집단적 정신 결속을 통해 자살을 예방하기 때문이다.

 (2) 가족
 16세 이후의 기혼/미혼자 자살 추이를 보면 기혼자는 가장 적게 자살하고, 사별한 자는 기혼자보다 더 많이 자살하며, 미혼자는 사별한 자보다도 더 많이 자살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가족의 영향이 자살 경향을 완화했다. 둘째, 결혼한 자들은 우월한 자들이라 자살율이 낮고 결혼하지 못한 자들은 열등한 자들이라 자살율이 낮으며 결혼은 단지 그 경향의 간접적 표출에 불과하다. (이 둘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열등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간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는 저자인 뒤르켐과 다른 시각이지만, 뒤르켐은 일단 이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논리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둘째 가설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빈곤은 그 자체로 사회적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아니다.(아노미적 자살 내용에서 나오지만, 오히려 사유재산을 소유한 사람이 많은 도일수록 자살률이 더 높다) 또한 인간을 자살로 유도하기 가장 쉬운 신체적·심리적 기질은 신경쇠약증인데, 신경쇠약증은 지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발병하기 때문에 열등함의 상징이라기보기 어렵다. 통계적으로도 자살 면역성이 내재적이고 유전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일단, 매우 젊은 층에서는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자살 경향이 더 크다. 그리고 둘째 가설이 맞다면, 미혼자/사별자 그룹은 나이를 먹을수록 열등한 사람만 계속 남게 되며 자살률이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기혼자 그룹의 상대적 자살률은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계속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동일 연령에서의 기혼자 그룹의 상대적 자살률은 일찍이 확 낮아지고 그 이후에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 가설이 옳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의 영향은 자살 경향을 완화한다. 이는 가족의 수가 많을수록 자살률이 낮아진다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집단의 밀도는 집단의 활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가족은 자살을 예방하는 강력한 보호 장치이며 가족이 강하게 통합되어 있을수록 그 예방력도 커진다.

 (3) 정치
 대중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에는 자살률이 두드러지게 낮아졌다. 이는 정치사회의 통합이 자살률을 완화했음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자살은 종교/가족/정치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 통합이 잘 된 사회일수록 자살이 적다.

 ② 이타적 자살
 : 인간은 사회로부터 직·간접적인 압박 내지는 종용으로 인해 자살할 수도 있다. 미개 사회에 보통 이런 유형의 자살이 많다. 일정 연령의 노인들이 함께 독약을 마시는 관습,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문화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경우는 자살이 의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에 가깝다.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자살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책의 서두에서 자살의 전제조건을 의지나 마음가짐이 아니라 ‘결과를 알고 행하는 것’으로 정의했으므로 이 유형의 자살도 자살이 맞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 위신을 얻고 부추겨지며, 그와 같은 보상을 거부당하는 것은 사실상 처벌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주로 개인이 자신에 대한 관심이 없고, 무조건적인 자기 부정과 극기 훈련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이런 자살이 발생한다. 그러나 오늘날(1897년 언저리를 의미한다) 많은 사회가 미개사회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이와 같은 유형의 자살은 드물다.
 
  이기적 자살과 비교하자면, 이기주의자는 세상에서 자신 말고는 의미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불행하며, 이타주의자의 슬픔은 자신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생긴다. 전자의 우울은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슬픈 의기소침이며 모든 활동이 완전히 무력해지고 할 일을 찾지 못해 무너져 내린다. 후자의 우울은 희망에서 나온다. 내세의 아름다운 모습을 믿기 때문에 현세가 우울해진다.(p.283)

 이에 대한 유의미한 통계적 증명은 군대가 있다.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군인의 자살 경향은 같은 연령대 민간인보다 최소 25% 최대 900% 높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인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자살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으나, 그렇다면 입대 직후 자살률이 제일 높고 차츰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복무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살률이 늘어난다. 따라서, 군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군인 정신을 이루는 습관과 천성을 포함하는 어떤 전체적인 상태(비인격성,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훈련) 때문이다.


 ③ 아노미적 자살
 : 인간은 사회 집단적 질서가 재적응해야 할만큼 크게 바뀌면 자살할 수도 있다. 조금 적나라한 얘기지만, 현실적으로 각 개인은 사회질서에 따라 자신이 가질 몫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암묵적인 서열과 계급이 있고, 그에 따라 욕망이 통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경제 호황이나 불황이 발생하면 그러한 서열과 계급이 흔들리며,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 때 개인의 욕망과 실제 처한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며, 그 괴리를 견디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경제적 호황이나 불황이 발생하면 자살률이 증가하는데, 이 때 증가하는 자살이 위에서 설명한 아노미적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변경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참고로 불황이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어 자살률을 높인다는 통념이 있는데,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호황에서도 사람들은 많이 자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곤은 자살을 유발하지 않는다. 유럽 각국을 조사해보면, 사유재산을 소유한 사람이 많은 도일수록 오히려 자살률이 더 높다. 핵심은 빈곤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계층이동이다. 부유하게 살아오며 그것을 본인의 위치로 생각하던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지면 자살하기도 하고, 드물지만 갑작스럽게 부유해지는 경우더라도 뒤바뀐 척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책에서 구체적 사례가 제시되지 않았는데, 부유해졌음에도 주변은 더 부유해져서 비교하고 더 많은 욕망을 추구하다가 좌절하고 자살하는 경우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위의 요약과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원문이 정갈하여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좋겠다 싶어서 반복을 감안하고서라도 원문을 가져온다. 이 아래는 p.317 ~ p.324 의 내용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 욕구가 많다. 인간은 안녕과 안락과 사치를 원하며, 외부의 통제가 없으면 이러한 정서적 욕구는 무한하여 만족을 모른다. 만일 사회가 개인의 욕구를 통제하지 않는다면 개인에게는 괴로움의 원천이 될 뿐이다. 욕망은 무한하므로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사라지지 않는 갈증은 끊임없는 고문이나 다름없다. 목표가 무한하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며,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영원히 불행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각 개인에게 한계를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회는 개인보다 우월한 정신적 힘이며 개인이 존중하는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만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계급의 구성원에게 앞으로 제공할 보상 수준을 정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사회적 기여의 개별적 가치, 그에 따른 상대적 보상, 직업별 노동자에게 평균적으로 적정한 위로 수준 등에 대한 지각은 사실상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사회의 도덕의식 속에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각각의 기능은 여론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며 그런 등급 서열에서의 지위에 따라 특정한 복지 계수가 정해진다.
 이러한 압력에 따라 각 개인은 자기 위치에서 막연하게 욕망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이상은 희망하지 않는다. 개인은 규칙을 존중하고 집단적 권위에 순종한다. 미록 이와 같은 결정이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든 욕망에는 이렇게 한계와 목표가 정해진다. 인간은 이 목표를 이뤄가며 안정감, 행복감, 생활의 즐거움을 얻고 개인도 사회도 건강해진다.
 그러나 사회가 고통스러운 위기를 겪거나 유익하지만 급작스러운 전환을 맞이하면 그런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상실되며, 이 때에는 자살이 갑작스럽게 증가한다. 경제 위기 때는 사회적 계급의 하락이 일어나고, 그러면 이들은 자신의 계급에 맞는 새로운 목표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들 중 몇몇은 그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위축된 삶을 버린다. 갑작스럽게 부유해지는 경우더라도, 척도가 뒤바뀐 이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아마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됨을 의미하는 듯)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 자살을 택할 수 있다.

 참고로 빈곤한 국가에서는 자살이 현저히 적다. 빈곤 그 자체가 일종의 규제로, 자살을 방지한다.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은 다른 분야에서는 간헐적이지만 상공업 영역에서는 만성적으로 발생한다.

 자살의 세 가지 유형은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은 이니다. 겹칠 수 있다.


 [3부]

 3부에서는 우리가 자살을 왜 줄여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우선, 자살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자살이 비도덕적인 행위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밀도가 높아지며 복잡성이 증가했다. 노동 분화, 개인간 차이 확대 등으로 인해 인간 집단의 구성원을 연결하는 유일한 유대는 인간이라는 점 자체뿐인 시대가 됐다. 집단 감정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이 되었고, 따라서 인간의 인격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높은 가치가 되었다. 이것을 양보하는 집단은 곧 모든 힘을 상실하고 말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조건 아래서 자살은 근본적으로 인간 숭배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비도덕적인 행위가 된다. 단, 자살은 동정을 받는 경우도 많고 우리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이 아닌 경우도 많으므로, 국민정서상 법으로 제재할만한 일까지는 아니다.

 정상성/비정상성의 시각에서도 현대 문명에서는 자살을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책이 쓰인 시점을 기준으로 자살은 근 50년도 채 안되는 동안 나라에 따라서 3~5배 증가했다. 이 정도의 변동성은 정상이 아니다. 따라서 지난 기간동안의 급격한 자살 증가는 병리적 현상이며, 날마다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해소해야 할 비정상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라는 문제가 남는다. 현대 문명으로 접어들며 이타적 자살은 거의 없어졌으므로, 우리가 다룰 자살 유형은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 뿐이다. 해당 자살유형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집단이 강화되어 개인을 더욱 확고히 지배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회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정치사회, 종교사회, 가족사회 모두 그런 사회집단으로서 기능하기 어렵다. 정치사회는 현대 국가에서는 개인에게 소속감과 연대감을 제공하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국가적·정치적 비상 상황에서만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종교사회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자살 경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상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 종교는 개인을 밀접하게 장악할 수 없다. 가족사회도 예전처럼 구성원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그 울타리 안에 묶어둘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족생활 기간도 짧아졌고, 어린아이들은 성장하자마자 각자의 야망에 따라 부모를 떠난다. 가족의 힘의 원천이었던 불가분성은 이제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직업사회가 있다. 같은 부류의 모든 노동자가 협동하고 모두 같은 기능으로 협동하는 직업 집단, 즉 조합이 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은 같은 과업에 종사하는 개인들로 구성되며 서로 연대하고 결속된 이해관계를 가지므로 사회적 관념과 감정을 발전시키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사회 집단을 생각할 수 없다. 출신 배경과 문화, 직업의 동일성은 공동생활의 가장 훌륭한 밑바탕이 된다. 더욱이 조합은 집합적 인격을 형성할 수 있으며 자율성과 성원들에 대한 권위를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증명되었다.(p.509)
 * 사실 이 ‘직업 집단’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와닿지 않는다. 아마 저 시대에는 기업이라는 것이 없다보니, 같은 일을 하는 개인들끼리 뭉치곤 했던 것 같다. 굳이 오늘날에 매칭시키자면 ‘업계’라고 하는 것이 많이 활성화가 되어있는 상황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이 해결책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공허한 해결책이긴 하다.

 직업 집단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개인들의 탐욕을 규제할 만큼 충분히 개인들을 지배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개인들의 욕구에 공감할 만큼 개인들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p.518)

 직업 집단은 개인의 협동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개인들과 접촉한다. 근로자들이 어디에 가든지 직업 집단은 있으나 가족은 그렇지 못하다. 조합은 개인에게 환경을 제공하고 도덕적 고립으로부터 그를 끌어내는 데 필요한 모든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몇 가지 정책적, 사회적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직업조직을 활요하여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의 질병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하면, 보통 그 병은 실제적인 치유가 필요 없고 반복적인 권고나 선의의 충고와 같이 말을 통한 교화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즉 관념의 체계는 다른 세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관념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경구를 말하기만 하면 되는 듯이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신적 특질의 변화는 우리 사회 구조의 심각한 변동을 요구한다. 즉, 정신적 특질을 치유하려면 사회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p.522~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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